이 영상은 뉴욕 플러싱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의 미국 이민 역사를 다룹니다.
초기 한국 이민자들이 세탁소나 식료품점 같은 사업을 일구며 겪었던 어려움과 역경을 조명합니다.
또한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성공으로 나아가는 과정과, 후세대가 더 나은 기회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The video discusses the history of Korean immigration to the U.S., focusing on the Flushing neighborhood in New York.
It highlights the struggles and resilience of early Korean immigrants who established businesses like laundries and grocery stores.
The narrative emphasizes the transition from survival to success, as subsequent generations move towards better opportunities.
경제적 생존과 적응:
고학력 한국 전문직 종사자들(서울대학교 의사 포함)은 1965년 이민법 시행 이후 언어 장벽 때문에 청소나 세탁과 같은 저숙련 직종에 종사하다가, 경제적 안정을 되찾기 위해 현금 거래가 가능한 사업(델리, 세탁소, 식료품점)을 시작했습니다.
1970년대 뉴욕 플러싱의 한국 이민자들은 은행이 신용 이력이 없는 이민자들에게 대출을 거부하자 “계(宋)”라는 상호 대출 모임을 만들어 사업 자금을 마련했고, 전통적인 금융기관을 우회하는 현금 기반 경제를 구축했습니다.
지리적 이주 패턴:
1980년대 플러싱에서 뉴저지로의 이주는 한국 이민자들의 성공에 힘입은 바가 컸습니다. 경제적 기반을 다진 그들은 생존에 급급한 노동자에서 기업가, 정치인, 전문직 종사자로 변모하면서 더 나은 학교, 더 넓은 집, 더 안전한 동네를 찾아 이주했습니다.
역사적 이민 물결:
한국 이민은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1903년 기근과 전쟁으로 인해 사탕수수 농장 노동을 위해 하와이에 도착한 102명의 한국인이었고, 두 번째는 1965년 이민법이 인종별 할당제를 폐지하고 가족 재결합과 전문직 종사자의 입국을 허용한 이후였습니다.
한국 전쟁과 일제 강점기는 한국 경제를 황폐화시켜 1900년대 초 이민 물결을 일으켰고, 1960년대 정치적 억압과 군사 통치는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향하는 두 번째 이민 물결을 촉발했습니다.
Economic Survival and Adap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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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y educated Korean professionals (including Seoul National University doctors) took low-skilled jobs like cleaning and laundry services due to language barriers after the 1965 Immigration Act, then pivoted to opening cash-based businesses (delis, laundries, grocery stores) to regain economic stabi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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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immigrants in 1970s Flushing, NY created a mutual lending circle system called “Kye” to fund businesses when banks refused loans to immigrants without credit history, establishing a cash-based economy that bypassed traditional financial institutions.
Geographic Migration Patte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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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1980s migration from Flushing to New Jersey was driven by Korean immigrants’ success—they sought better schools, larger homes, and safer neighborhoods after establishing economic footing, transforming from survival-focused laborers to entrepreneurs, politicians, and professionals.
Historical Immigration Wa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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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immigration occurred in two distinct waves: first in 1903 with 102 Koreans arriving in Hawaii for sugarcane plantation work (driven by famine and war), then post-1965 when the Immigration Act abolished racial quotas and enabled family reunification and skilled professional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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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orean War and Japanese colonization devastated Korea’s economy, creating the early 1900s emigration push, while 1960s political oppression and military rule drove the second wave seeking political freedom and economic opportunity in America.
(더 자세한 정리:)
뉴욕의 한인타운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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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한인타운은 더 이상 플러싱이라는 지역만이 아닌 뉴저지 팰리세이지 파크에도 한인 경관이 두 명 추가로 채용되어 확장되고 있으며, 플러싱 먹자 골목에서도 한인 식당들의 실력 영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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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지하철의 종착역 메인 스트리트 역을 빠져나오면 아시아인들이 많아 아시안 타운인 것처럼 여겨지며, 이곳은 미국이지만 묘한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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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1세대의 삶은 베네틴의 화려한 마천루에서 일하고 플러싱의 낡은 벽돌집으로 돌아오는 낙차를 느끼는 것이며, 메인 스트리트로 나오면 차이나타운의 모습이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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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에는 중국어 간판이 많으며, 한국어 간판도 함께 보이고, 약간의 연변 느낌도 나며, 뉴욕 매네만 가도 중국어 간판과 한국어 간판이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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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뚜레주루, 피부 레이저, 유니온 발병원 등 한국어 간판이 보이고, 1970년대부터 이어져온 낡은 벽돌 건물들이 여전히 서 있으며, 전 세계에 한국인이 약 700만 명이 살고 있다 (00:01:49).
재외동포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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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동포는 대한민국 인구의 14%에 해당하며, 일곱 명 중 한 명은 해외에 있다는 뜻이고, 주중 가장 많은 나라는 미국으로 약 260만 명의 재외동포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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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동포들이 모여 있는 곳은 크게 세 군데가 있으며, 미국에 살고 있는 재외동포의 1분의 1 이상이 이곳에 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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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뉴욕, 뉴저지 지역에는 20만 명이 넘는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뉴욕의 플러싱과 같은 공간이 왜 필요했는지부터 살펴봐야 하며, 이에 대한 답은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102명의 한국인이 갤리코라는 배에서 내렸던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00:02:48).
한국인 미국 이민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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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한국 최초의 미국 이민자들이었으며, 아메리칸 드림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 하와이의 사탕수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왔으며, 당시 조선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1901년에서 1902년 사이에는 한반도에서 대흉년이 들었으며, 사람들은 굶주렸고 전염병도 돌았으며,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으로 인해 조선 정부는 무너지고 있었고 일본의 압력은 날로 거세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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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부터 1905년까지 약 7,000명의 한국인이 하와이로 갔으며, 하루 10시간 이상 뜨거운 햇볕에서 사탕수수를 베었으며, 월급은 16달러였으며, 당시 조선에서 쌀 16가를 살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00:04:16).
1965년 이민법 개정과 한국인 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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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10월 3일, 린든 존슨 대통령이 뉴욕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이민 그리고 국적법 개정 안에 서명했으며, 이 법은 미국 이민사를 완전히 바꿔 놓았으며, 인종 쿼터가 폐지되었으며, 가족 초청 이민도 허용되었으며, 전문직 이민도 가능해졌으며, 1960년대 후반부터 온 한국 이민자들의 학력 수준은 당시 한국에서 대학 진학률은 10% 미만이었지만, 미국으로 온 한국 이민자 중 대졸이 40%가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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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대 한국은 경제적으로는 가난했지만 교육률은 매우 높았으며, 하지만 경제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고학력자들의 일자리가 부족했으며, 의사, 엔지니어, 교수가 돼도 한국에서는 제대로 된 보상을 받기 어려웠으며, 1960년대 70년대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으며, 정치적 자유가 없었고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었으며, 지식인들은 감시받기도 하고 때로는 탄압받기도 했으며, 그래서 이들은 미국으로 향했다 (00:06:10).
이민 초기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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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1969년부터 71년까지 816명의 의사가 미국으로 떠났으며, 한국에서 대학을 나온 지식인들이 미국에 와서는 청소와 세탁소를 해야 했으며, 언어 장벽 때문이며, 아무리 한국에서 의사 자격증이 있어도 영어로 환자를 진료할 수 없으면 소용이 없으며, 엔지니어 학유가 있어도 미국 기업에서 경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취업이 안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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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대를 나온 공학도가 미국에 와서 매네튼 오피스 빌딩을 청소하고 의대를 나온 의사가 브루클린에서 세탁소를 열었으며, 자존심 그런 건 배고픔 앞에서는 사치였으며, 그래서 이들이 선택한 것이 바로 남의 밑에서 일하지 않겠다는 델리 세탁소 식욕품점 (00:07:28).
한국인의 경제적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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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유대인들이 뉴욕의 유통망을 꽉 잡고 있었고, 그 틈새를 한국인들이 부지런함이라는 무기로 파고 둘 수 있는 영역이 바로 천과물이나 세탁소였으며, 유대인들이 안식일 지키느라 토요일에 문을 닫을 때 한국인들은 연중 무휴로 가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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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싱 지역은 1970년대에 한국인들이 처음으로 정착하기 시작한 곳으로, 첫 번째 주거비 때문이었으며, 매네튼의 절반도 안 되는 집값과 저렴한 월세로 인해 이미 온지 얼마 안 된 가족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00:09:17).
플러싱의 정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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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의便으로 인해 7번 지하철 노선 하나로 매네튼까지 30분이면 갈 수 있었으며, 차가 없어도 영어를 못 해도 지하철만 타면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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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싱은 원래 한국인 동네가 아니었으며, 도시 사회학에서는 이민자 승계라고 하는데, 한 이민자 그룹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면 더 나은 동네로 떠나고 그 자리를 다음 이민자 그룹이 채우는 패턴이었다 (00:09:56).
이민자들의 금융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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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대에 한국 이민자들은 대부분 크레딧 히스토리가 없어서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 없었으며, 그래서 한인들은 서로에게 돈을 빌려 주는 개를 한 방식으로 현금 경제를 운영했다 (00: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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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스템은 서로 얼굴을 알아야 하고 같은 동네에 살아야 하며, 신뢰로 작동하는 시스템이었다.
플러싱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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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싱은 이렇게 자본을 만들어 냈으며, 한국인들은 이곳에 뿌리를 내렸으며, 10년 20년이 지나가면서 사람들이 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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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싱은 버티는 곳이었지만, 이제는 한인 1세대가 운영하던 가게들이 하나 둘 중국계 자본으로 넘어가고 있으며, 이민 1세대 다음 세대는 더 나은 학군, 더 넓은 집, 더 안전한 동네로 이동했다 (00:12:24).
한국인들의 성공과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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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에서 한국인들은 시장이 되고 하원 의원이 되고 실리콘 밸리의 CEO가 되었으며, 강 건너에서 한국인들은 미국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는 법을 배웠다 (00:12: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