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펙터블

험난한 여정을 넘어 바른 삶을 보여주는 탈북청년

탈북민이 남한에서 3년을 보낸 후 북한으로 돌아오는 험난한 여정을 이야기합니다.
어머니와의 감격적인 재회, 탈북의 어려움, 그리고 남북한의 극명한 대조를 이야기합니다.
그의 이야기는 탈북민들의 고군분투와 통일에 대한 그들의 희망을 조명합니다.

 

A North Korean defector shares his harrowing journey back to North Korea after three years in South Korea.
He recounts the emotional reunion with his mother, the challenges of escaping, and the stark contrasts between life in North and South Korea.
His story highlights the struggles of defectors and their hopes for reunification.

 

 

탈북과 가족의 어려움:

2011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22세의 한 북한 남성이 군 복무나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해 기회가 부족해 탈북했습니다.
탈북자와 그의 친구는 중국으로 탈출하여 3개월 동안 성경을 공부하고, 교회 등록을 통해 한국 입국 서류를 받았습니다.
탈북자의 어머니는 암독강을 건너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망설임 끝에 6월 26일 탈북했습니다.

 

탈북의 어려움과 위험:

탈북은 2019년 5월 압록강을 건너는 것이었으며, 탈북자는 국경 통과를 도울 중국인 6명을 모집했습니다.
탈북자는 젊은 북한 군인을 물리치고 양강도의 한 시골 교회에 2주 동안 숨어서 간신히 체포를 피했습니다.
북한에서 일본 영화나 미국 영화를 보는 것은 가혹한 처벌로 여겨졌으며, 한 친구는 조사 중 절벽에서 뛰어내려 하반신 마비가 되기도 했습니다.

 

북한 생활:
북한의 식량난으로 개고기, 토끼고기, 고구마를 먹었고, 고춧가루가 비싼 흰 김치와 어려운 가정은 잡곡밥을 먹었습니다.
생활 환경은 열악하여 겨울에는 3cm 두께의 얼음이 얼고 밤에는 끓인 물을 용기에 담아야 했습니다.
교육은 전직 자본가이자 지주 출신 교사들에게 김일성 혁명사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남한 적응:
탈북민은 약 1년간 민주화시민연합에서 교육을 받은 후 국민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탈북자와 그의 아버지는 브로커에게 진 1,500만 원의 빚을 갚기 위해 노력했고, 약 1년 만에 빚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북한 정권의 영향:
탈북자는 북한의 선전과 세뇌 활동이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효과적으로 통제한다고 생각합니다.
국제 사회는 인권 유린을 규탄하고 북한 주민들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지원해야 합니다.
한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적응하려면 문화적 이해와 언어 능력이 필수적이며, 탈북자는 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더 자세한 정리:

탈북 과정:
김강우씨는 2016년에 탈북하여 대한민국으로 이사왔으며, 어머니와 아버지가 북한에 남아 있었고, 3년 정도 한국에서 살다가 2019년 5월에 브로커를 통해 어머니를 모시러 북한으로 다시 가버렸다고 합니다.
김강우씨는 인천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갔으며, 옷이 젖은 상태에서 몸을 하다 보니까 흙먼지가 엄청 붙은 거예요, 그리고 시내에 내렸을 때는 오후 8시쯤이었는데 차들이 다니고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합니다.
김강우씨는 임진강 앞에서 북한이 보이는 곳으로 왔으며, 북한에 한 번 더 갔다 오신 걸로 알고 있고, 다시는 가고 싶지 않지만 통일되면 가야죠라고 합니다.
김강우씨는 22살 때 탈북해서 친구랑 함께 왔었으며, 탈북을 하게 된 원인은 아버지가 먼저 탈북 가셨다가 중국에서 붙잡혀 북한 보위부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김강우씨는 아버지가 정치범으로 몰려서 돌아가시면서 그 사건이 제일 큰 계기였으며, 군대에 나가지 못했고, 돈이 없어서 대학교에 갈 수도 없었고, 북한에서 살면 더 이상 희망도 없었던 거죠라고 합니다.
김강우씨는 어머니가 재원을 하셨고, 새로운 아버지가 러시아에 살고 계시며, 그분이 남한의 대학생 친구들을 만나봤었나 봐요, 그래서 어머니가 매일 희망이 없는 사회에서 썩고 있냐고 말씀을 하시니까 그것도 어느 정도 많은 영향을 줬다고 합니다.
김강우씨는 혼자 나오신 것이 아니며, 친구 한 명이랑 같이 내 넘어왔으며, 그 친구는 지금 결혼하고 잘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탈북을 하기 위해 20살 때부터 결심을 했었으며, 친척이 없는 상태에서 루트를 찾는게 제일 어려웠다고 합니다.
김강우씨는 친구를 데리고 강을 넘겨서 중국에는 가본 경험이 있으니까 그렇게 넘겨 주면 그 친구의 친척분이 우리를 다 데려가 주게 그렇게 얘기를 해 가지고 그런 친구를 두 명을 찾았으며, 세 명이서 너적 강을 건너려고 했지만 결국 그 친구는 혼자 왔고요, 저랑 처음에 같이 가기로 결심했던 친구 둘이서 핸드폰이 문제가 되어서 결국에는 두 명이서 같이 가지 못하게 되었어요.
탈북 청년은 북한 사람들과 함께 중국의 산에서 벌목 일을 하던 중, 중국 사람의 핸드폰을 훔쳐 가지고 나와서 산에서 중국 군인들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중국 군인들이 쫓아오자 친구와 함께 도망쳤고, 친구가 핸드폰을 들고 있었으며, 그 청년은 혼자였기 때문에 친구가 먼저 가거나 자신을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청년은 친구와 함께 한국으로 가기 위해 국경 옆의 도로에 나가서 차를 타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친구가 자신을 찾아와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두 사람은 중국 군인들의 경비대를 피해서 강을 건너고, 숲으로 들어가서 군인들이 쫓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청년과 친구는 브로커를 만나서 한국으로 가는 방법을 물었고, 브로커는 300만 원의 비용을 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브로커는 또한 3개월 동안 중국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 공부를 하면, 교회에서 등록금을 내면 한국으로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청년과 친구는 교회선으로 가서 하나님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때는 교회선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교회선이 안전하다고 한 이유는 브로커가 돈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청년은 10월 6일 한국에 입국하였으며, 탈북자가 많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우물 안에 개구리처럼 살아오다 보니 세상이 넓은 줄을 몰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민수용소에서 태국 남민수용소에 세터민이 150명 정도 있었으며, 국정원과 한원을 수료하였고, 국정원에서 밥이 맛있었다는 얘기를 하셨고, 친구와 오다 보니까 북한에 계신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국정원을 지나서 한원에 수료를 하면서, 사회에 적응하는 기초 교육을 시키는 곳에서 열심히 배웠으며, 북한말과 남한말의 차이, 책을 읽을 때 북한 책과 다른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 생활:
북한에서 가져온 물건 중에 아버지와 위할아버지, 위할머니의 영정 사진이 있으며, 2009년도에 아버지가 위할아버지와 위할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을 가지고 있습니다.
북한에도 벚꽃이 있으나, 거의 못 본 것으로 알고 있으며, 평양에 다섯 번 정도 가 본 적이 있으며, 그때 벚꽃인지 모르겠지만 도로변에 가로수들이 꽃이 피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북한에는 절관이 있으나, 스님들이 당원이기 때문에 여기 절처럼 편안한 분위기를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쨌든 새 아버지가 북한에 여전히 남아 있었고, 다시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산이 민둥산이라고 들어 왔으며, 해산이라는 게 원래 산의택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며, 도시 이름이 해산 출신이기 때문에 산을 좀 잘 타고, 4월쯤 되면 초중고 학생들 데려다가 나무심기도 하고, 그런 활동을 합니다.
탈북청년은 파주시 탄면에 있는 절에서 오토바이 사고를 냈으며, 그때 크게 넘어졌지만 다치지 않았고, 오토바이는 많이 망가졌다고 한다.
탈북청년은 위할머니 집에서 해마다 김치를 담았었고, 김치를 땅에 파서 보관했다고 한다.
탈북청년은 2019년 5월에 브로커를 구해서 어머니를 모시러 가겠다고 전화를 걸었고, 어머니가 넘어올 시점에 마중을 가기 위해서 인천 공항으로 가서 중국 연길에 가서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고 한다.
탈북청년은 중국에서 어머니와 만나서 어떻게 모셔올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고, 어머니의 반응은 좋았으며, 어머니가 탈북청년과 함께 살고 싶어한다고 한다.
탈북청년은 중국에서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도중, 중국 사람들과 함께 차량을 타고 연기를 해서 7시간 8시간 정도 걸렸으며, 중간에 두 번 정도 휴식했다고 한다.
탈북청년은 어머니와 통화를 하면서, 어머니가 암독강을 건너왔을 때 탈북청년을 어떻게 찾을지 걱정했으며, 어머니가 새 아빠를 두고 올 수 없다고 하여 탈북청년이 같이 모셔 오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탈북청년은 어머니와 통화를 하는 중에 통화가 끊겼으며, 그 이유는 어머니가 브로커가 빌린 핸드폰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금이 다 떨어져서 통화가 끊기자, 계획을 세우고 다시 북한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했다.
북한 쪽을 바라보다가 군인들이 밥 먹으러 간 시점에 암록강을 건너기 시작했는데, 물이 너무 차갑고 긴장했다.
강 절반을 건넜을 때 눈앞이 부여지고 긴장하여 눈물을 흘렸으며, 강을 건너고 나서 옷이 걸려서 떨어졌다.
군인이 나타나서 야단치고 올라오라고 하자, 올라갔고 군인이 배낭을 뒤지기 시작하여 여권과 초코파이, 간식들이 나왔다.
군인이 AK를 들고 있으니까 총을 쏠 수도 있겠다 생각했고, 군인이 먼저 개머리판으로 가격을 했으므로 아픈 척하고 비명지르면서 무릎 꿇었다.
군인이 제 짐을 풀 때 다리 잡아서 낚채 넘어뜨리고 몸을 한 뒤,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알았다.
군인이 견장을 보고 나이가 어리다고 생각하고 자신감이 붙었으며, 몸도 외소해 가지고 면제 해 볼만하다고 생각했다.
옷이 젖었고 군인과 싸우면서 커피와 피가 묻어났으며, 옷이 젖은 상태에서 몸싸움을 하다 보니까 흙먼지가 엄청 붙었다.
한 8시쯤에 북한에 도착하여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고 놀랐으며, 그곳에서 옷이 젖어 있는 자신이 강을 건너온 사람임을 알리게 되어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을 피하기 위해 집방향으로 뛰었고, 그때부터 어둠 속에 숨길 수 있었다.
그곳에서 자신과 싸웠던 친구가 위에 있는 초소에 전화를 했고, 자신은 10분 정도 뛰어 올라가 성동이라고 불리는 큰 도로에 도착했을 때 군인이 두 명이 뛰어나와 자신을 따라 나왔으나, 출입구를 찾지 못해 허둥거렸다.
자신은 3년 동안 한국에 있다가 북한에 갔을 때 북한 사람들을 보고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인해 당황했으며, 사람들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게임을 하듯이 사람들을 느꼈으며, 해산시의 경찰들 보안원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것을 보고 빨리 산으로 도망가야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어머니가 나왔을 때 말을 못 하고 어머니도 아무 말도 못 하시고 주저 앉으셨으며, 어머니를 보셨을 때 다 젖은 상태였고, 집까지 뛰어갔을 때는 몸에 갈비도 아픈 거 같고 지쳤으며, 기지 맥막지나서 긴장도 풀리면서 어머니와 조금 얘기하다 잠들었고, 다음날 눈 떴을 때 어머니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돌아올 것 같았으며, 자신이 돌아온 것을 믿지 못하는 듯했으며, 그 정도면 재판받을 때 판례가 전 있었던 걸로 알고 있으나 북한은 CCTV가 없어서 안 잡히는 거라고 한다.
탈북 청년이 한국에 온 지 3년 만에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려고 하였고,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으며, 북한 국경이 봉쇄되어 브로커가 사람을 넘길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청년은 어머니와 함께 한국으로 오기 위해 5월 20일 밤에 북한을 넘었으며, 5월 31일까지 특별 경비가 내려와 북한 국경이 봉쇄되었습니다.
청년은 북한 말을 다 잊어버려서 어머니가 북한 말로 대화를 해야 했으며, 청년은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어머니가 먼 친척이라고 말했습니다.
청년은 북한 내에서 브로커를 고용하면 230만 원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돈이 있으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청년은 어머니의 임맥들을 통해서 브로커를 알아보았으며, 돈을 보내 달라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보내줄 사람은 없었으며, 전화가 도청되었습니다.
청년은 북한 보위부의 감시를 받게 되고, 2016년에 탈북한 사실이 발견되어 감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청년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잡히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매를 맞았으며, 청년은 도망을 쳤습니다.
탈북 청년이 북한에 다시 헤엄쳐서 가버린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북한에 도착한 후 어머니와의 재회에서 어머니가 아들 안 왔다고 소리 치는 것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어머니와의 재회에서 어머니가 아들 안 왔다고 소리 치는 것을 듣고 정신을 차린 후, 어머니와 아버지가 북한 당국에 의해 차에 태워져 데려가졌다고 한다.
탈북 청년은 어머니가 데려가진 후 너무 허탈해하고 쫓기는 와중에 여권을 잃었었고, 그 집 마당에 들어가서 여을 찾아가지고 어두운 데서 다행히 찾았다고 한다.
어머니가 북한 당국에 의해 조사받은 후, 탈북 청년이 사실은 오라고 전화가 와서 솔깃해서 그 브로크가 뭔가 하는 사람 따라 나갔다가 도저히 당을 배반하는 건 아닌 거 같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돌아오던 길이었다고 어머니가 말한 것을 설명한다.
탈북 청년은 다시 북한에 올 거라고 생각한 북한 당국이 어머니를 풀어주고 감시를 한 후, 하루 한 번씩 보고를 해야 되고 브로크한 사람이 오면 붙잡을 수 있게 도와야 한다고 했다.
탈북 청년은 이틀 동안 굶고 막 떠돌아 다닌 후, 중학교 여자동창에도 만났고, 어머니 친구들 집에 찾아가서 배고파서 들어갔는데 막 밥 안 주고 가라고 하신 분들도 계셨다고 한다.
탈북 청년은 먼 친척분 중에 핸드폰이 있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 번호를 위해 가지고 아까 그 친구 어머니 집에서 전화를 해 가지고 그분이 오셔서 어머니가 풀려 놨고 그 사실을 다들은 후, 다시 넘어왔던 곳으로 가서 6-7m 되는 뚜에 올라서 가지고 군인이 있든 없든 신경도 안 썼다고 한다.
탈북 청년은 중국으로 건너갈 거고 대한민국 이건 있고 무조건 중국에서 잡혀도 대상관 통해서 한국으로 갈 수 있으니까 다시 건너올 때보다 무섭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탈북 청년은 북한에 다시 헤엄쳐서 가버렸고, 그 이유 중 하나는 어머니가 고생하고, 자신 때문에 보이브 잡혀가 맞고 고생했으므로 미안해서 빠르게 뛰어 건너서 안강 다시 수용에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시 잡히고, 취 받은 후에 강우 씨는 다시 넘어오셨다가, 두 번째 시도를 다시 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때 브로커를 전화로 해 가지고 어머니랑 아버지가 집에서만 도망쳐 나와서 밤에 그 집을 버리고 해산실을 벗어나서 양강도 안에 있는 차그한 교회의 어떤 시골에 가서 지냈다.
어머니가 식비 다 되고, 그 집에서 그러다가 넘어 넘겨 준 것으로 보이며, 그 타이밍을 잘 잡아 가지고 그때는 안 잡히고, 6월 11일 날에 다시 북한에서 넘어왔으며, 어머니가 탈북한 시점은 6월 26일이었다.
중국에서 공강에 연결 공강에서 비행기타로 들어갔다가 비자가 만료돼서 잡혔으며, 출입경 관리국에서 조사를 받았고, 짐도다 압수당하고 여건이라 거기서 이제 조사를 받았다.
중국은 또 그 출입 등록을 해야 되며, 숙박 등록 같은 걸 해야 되는데, 어느 호텔에서 자꾸 이런 게 기록이 아예 없는 것으로 보이며, 5월 11일 날에 영일이 갔는데 그날로부터 한 달 좀 넘는 40일이란 기간 동안 중국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모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조사 중에 조선족 경관분이 저를 이제 데려가서 비자 사진도 찍고, 절차도 알려주고, 막 비자 발급 다시 해 주셨으며, 양복도 빌려다 사진 다 찍혀서 이제 해주고, 공항에 태우다도 줬다.
부모님은 오시지 못하고, 해산에 숨어 있는 상황이고, 강우 씨는 6월 11일 날 이제 중국에 넘어와서 6월 한 15월까지 기간에 있었으며, 그 후에 한국 다시 온 것으로 보인다.
강우씨는 한국에 오신 후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으며, 그 와중에 가까웠던 형이 신고를 해서 마음이 아팠고, 상황이 꼬여서 북한에 들어가 못 나오게 되자 도움을 요청했지만 월급조사 안 넣어 준 적이 있다고 하며, 그때의 상황이 매우 힘들었다고 합니다.
강우씨는 브로커와의 문제로 인해 민사 소송도 걸려 있었으며, 그때의 빚을 아버지가 열심히 일해서 갚아 주셨고, 강우 씨도 일을 해서 지었던 빚을 갚았으며, 그 후에 어컨 설치하는 일을 배웠고, 열심히 일해서 그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강우씨는 1년 동안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 카드값과 다른 빚이 쌓여 있었지만, 아버지가 브로커 비용을 갚아 주시고, 강우 씨도 일을 해서 그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었으며, 그 후에 철은이 형이 전화가 와서 채널에 나오자고 하였다고 합니다.
강우씨는 철은이 형을 매우 존경하며, 한국 사회에서 처음에 힘들 때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하며, 그 형이 뉴질랜드 갔을 때 학비와 비행기 티켓값도 도와주셨다고 합니다.
강우씨는 그 후에 어컨 설치하는 일을 배웠고, 열심히 일해서 그 일을 잘 배울 수 있었으며, 지금도 일당으로 아르바이트를 가끔 하며,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합니다.
탈북 청년은 지하철을 타고 와서 노래방에 가서 걱정 말아요 그대를 불러주면서 형이 있으니까 공부해라라고 말했으며, 유튜브에 나와달라고 요청을 받았고 인터뷰를 통해 제일쁘게 했던 사건을 이야기했다.
많은 사람들이 힘내라고 돈을 보내 주시고, 한 분의 어르신은 등록금을 지원해 주겠다고 하며, 북한인과 시민연합이라는 단체에서 학생을 찾아서 공부시켜 주라고 기부를 하셨다.
북한인과 시민연합 단체에서 면접을 진행하였고, 어르신들과 부국장님들이 오셔서 공부할 의지가 있는지를 확인하였으며, 탈북 청년은 담백하게 말씀을 드렸고, 그 결과 교육 팀에서 번갈아가면서 매주 수학, 영어, 원술 등을 가르쳐 주었다.
탈북 청년은 1년 정도의 교육 과정을 거치고, 국민대에 합격하였으며, 나이가 많아 아무도 안 받아줬지만, 등록금을 지원해 주신 어르신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다.
어머니는 울증을 심하게 오셔서 거의 하루 한 번은 전화를 드려야 되고, 지금은 많이 나아지셨으며, 어머니는 대학교를 마치시고 대학원에서 상담리학과를 다니고, 영예군인으로 북한에서 군복을 하다가 허리를 다 친 후, 시니어 배우로 연기를 도전하고 있다.
탈북 청년은 어머니의 상황으로 인해 공부를 미루었지만, 지금은 학교를 다니시면서 열심히 공부할 의욕이 생기고, 등록금과 생활비를 지원받아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북한에서의 경험:
김강호는 2016년에 탈북하여 한국으로 나온 후 3년 동안 한국에서 생활하며 다양한 음식들을 맛보았고, 특히 삼겹살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강호는 북한에 다시 갔을 때 어머니가 불고기를 준비해 주었지만, 삼겹살과는 달리 맛이 안 나더라고 하며, 이는 조미료나 불판의 차이 때문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북한에 다시 갔을 때 김강호는 북한의 음식들이 예상했던 맛과 달랐으며, 삼겹살을 먹고 싶었지만 조미료가 없었고 불판이 달라서 맛이 안 난다고 한다.

김강호는 북한에서 다양한 음식들을 먹어보았으며, 중국돈을 챙겨간 덕분에 어머니가 돈을 받아서 잘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김강호는 북한에 계신 가족분들이 돈을 보내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으며, 한국에서 돈을 보내주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잘 사는 집은 티가 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강호는 돈을 쓰는 것도 점진적으로 나아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괜찮다고 생각하며, 갑자기 많은 돈을 쓰면 뇌물을 쓰거나 발각될 수 있다고 한다.

북한에서 자유나 인권과 같은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하면 다시 북한에서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자유와 인권을 경험한 후에는 북한의 문화와 생활 방식에 적응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북한의 뇌물 문화와 빈부격차가 심하다는 것을 언급한다.

한국에서 다양한 알바를 해보았으며, CU 편의점과 고깃집에서 일한 경험을 가지고 있고, 365 아름다운 가게에서 자원 봉사를 하면서 안 쓰는 물건을 기부하고 재활용하는 것을 도와주는 활동을 했다고 한다.

북한에는 기부라는 개념이 있긴 하지만, 사회적으로 기부를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으며, 기부라고 하긴 어렵지만, 예를 들어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데려다 키워주는 사람이나, 선전용으로 발전소 건설에 기부한다는 식으로 표현한다고 한다.

어릴적에 교육을 받을 때, 지주 출신이지만 애국심으로 땅을 많이 가지고 있는 북한의 자본가나 지주들을 타도 대상으로 보았으며, 김일성의 인품에 매혹되어 땅을 나눠 주는 농부들이 있었다고 한다.

북한의 된장찌개와 김치찌개는 기억나지 않으며, 한국의 식당에서 파는 된장찌개와 김치찌개를 더 좋아한다고 하며, 어머니의 음식은 좋지 않으며, 음식을 하기 위해서는 자유와 여유가 필요하다고 한다.

북한에서도 고기를 구워 먹을 수는 있지만, 한국처럼 구멍이 나거나 불판이 아닌 철판 같은 곳에서 구워 먹었으며, 고기가 많이 타지 않고 삶은 느낌으로 먹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개를 많이 잡아먹으며, 토끼와 닭 등도 많이 먹으며, 단고기는 개고기라고 한다.

북한의 김치는 대부분이 빨간색이지만, 고춧가루가 비싸서 일부 지역에서는 하얀 김치를 먹었다고 한다.

북한의 밥은 양이 많고, 잘 사는 집에서는 다양한 음식을 먹지만, 어려웠던 집에서는 잡곡밥을 많이 먹었다고 한다.

북한에 계실 때 한국에서 제일 먹고 싶은 음식은 카레밥이었으며, 북한에서도 매운 음식을 좋아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고추를 청양 고추로 만들어 먹었으며, 아버지가 매운 음식을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한국 음식 중에서 아직도 못 먹는 음식은 없지만, 평상시에 돈 주고 사 먹지 않는 음식은 곱창이라고 한다.

북한에서는 선풍기만으로 생활하며, 여름에는 집안이 선선하고 겨울에는 매우 추웠다고 한다.

겨울에는 추운 것을 이기기 위해 움직이고, 잘 때는 물을 끓여 놓은 용기를 사용하여 추위를 이기려고 했다고 한다.

북한에서 겨울이 되면 매우 추워서 얼음이 3cm 정도로 얼어 붙는다고 하며, 아몬센이라는 탐험가의 책을 읽은 후 창문을 열고 자서 어머니에게 혼난 적이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추운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하며, 북한에서는 샐러드나 핑크색 무 같은 음식이 없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당근을 기르지 않았으며, 당근을 먹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라면을 먹지 않았지만, 중국에서 라면을 먹어본 적이 있다고 하며, 특히 중국 라면인 우용면을 먹어본 적이 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한국 라면을 먹어본 적이 없으며, 중국 라면을 먹은 것은 중국에서 넘어온 라면을 먹은 것이었다고 한다.

 

북한과 한국의 문화 차이:
북한에서는 다른 나라의 미디어를 접할 기회가 많으며, 특히 중국과 러시아의 미디어가 많이 유통되며, 한국의 미디어는 가장 드물게 보인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한국 미디어를 보는 것이 가장 처벌이 강하다고 하며, 미국 미디어도 약간의 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일본 미디어도 북한에서 구하기 힘들었으며, 일본 애니를 보는 사람도 거의 없다고 한다.
건물에서 뛰어내린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16살 또는 17살 때 하반신 마비를 가지고 있었고, 조사하다가 오청에서 뛰어내렸다고 한다.
그 친구는 친한 동생의 친구였으며, 뛰어내리는 용기에 놀랐고, 하반신 마비를 가지고 앉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쓰럽다고 한다.
북한에서 노동 교화형이라고 하면 최소 1년을 못 보겠으며, 사람이 웬만하면 죽거나 병신이 돼서 끝난다고 보아야 한다.
북한의 법은 청소년 미성년자라고 해서 봐주거나 그런 건 없으며, 북한에 있는 친구들이 보고 싶지 않지만, 몇몇 친구들은 많이 보고 싶다.
저녁에 혼자 있고 이러면 계속 생각나며, 아무래도 초중고를 북한에서 다녔기 때문에 교육을 받았으며, 친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었다.
친구들이 대학을 다니고 있었으며, 본인들이 대학 졸업하고 일을 하게 되고, 힘들 때 서로 의지해서 같이 살자고 했으며, 가지 말라고 잡아주는 사람들이 고맙다.
연락은 안 되지만, 평생 그 친구들을 기억하고 살겠으며, 여기 와서 좋은 사람들 만나 가지고 같이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 생활:
대학에서는 한국에서 다니고 계시며, 학교가 다른 데로 좀 어이 남안에서 고등교육까지 마친 친구들에 비해서 기초 실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거로 생각하며, 교과의 차이와 교수님들 나름대로의 교재 선정 등이 신기해 보이고 과목의 개수도 다양해서 좋다.
탈북 청년은 북한 대학을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좋았던 북한 대학에 대해 말할 수 없으며, 한국학교도 다니지 않았지만 대한학교의 여명학교에 3개월 정도 다녔습니다.
대한학교에 다닐 때, 3국출생 아이들이 많았으며, 재미있었고, 외국인 처음 보는 경험도 했습니다. 또한, 북한에서 온 아이들이 많았으며, 일부는 중국에서 출생한 아이들이었습니다.
탈북민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 않는다고 하며, 본인은 처음 22살 때 북한을 나왔을 때부터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 않았으며, 대학교에서도 탈북민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말했습니다.
본인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 않으며, 누가 물어보면 얘기를 하지만, 굳이 먼저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사람들이 진심이 전해지면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은 대학에서 동기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으며, 친구들이 자신을 도와주려고 하며,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또한, 본인은 미디어에서 본 것과 달리 대학 학생들이 반듯하고 좋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은 한국에서 약간의 에피소드가 있었으며, 하나는 인천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 한 경험입니다. 본인과 친구, 그리고 형이 함께 인천에 놀러 갔을 때, 아이스크림을 샀으며, 세 명이 하나씩 나눠 먹었습니다.
본인은 대학에서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으며, 약속을 잘 지키고, 세심하게 배려해 주는 친구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본인은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미디어에서 본 것과 달리 대학 학생들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생활의 어려움:
각이 바닥에 앉아 음식을 먹어야 했는데 수푼이 없어서 먹는 방법을 몰랐고, 친구가 먼저 그랬는데 수푼이 없는 것을 보고 불친절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친구가 음식을 땅에 놓고 밟았는데, 그 안에서 수분이 나왔고, 이 경험은 당시의 삶을 살던 사람들이 지금은 잘 적응해서 그런 경험이 꽤 있었음을 보여준다.
종암동에 살았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집을 찾지 못하고 3~4시간을 헤매었던 경험이 있었고, 107동을 찾고자 했지만 여러 개의 107동이 있어서 당황했다.
지하철로 이동하는 것은 쉽지만, 집을 찾는 것은 핸드폰으로 네이버 길찾기를 해야 되는데 처음에는 어려웠고, 카톡 아이디를 만드는 것도 어려웠다.
북한에서 생활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토요일마다 하는 조직 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았던 친구가 있었고, 버스 노선이 많아 버스를 타는 것이 어려웠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갔었지만, 지금은 커피를 좋아한다.
북한에서 김일성 대원수님과 김정일 장원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생활을 돌아보고, 잘못한 것을 반성하고, 앞으로의 대책을 이야기하는 세포총을 하였다.
북한에서 온 젊은이가 한국에서 3년을 살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특히 언어와 문화의 차이로 인해 힘든 적이 많았다고 한다.
한국에서 살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언어 때문이 아니라, 북한과 다른 생활 방식과 문화의 차이였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동네 사람들이 서로 잘 알고 지내고 도와주었지만, 한국에서는 이웃들이 누군지 모르는 경우가 많고, 도와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북한에서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선뜻 도와주었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경우가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