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난한 여정을 넘어 바른 삶을 보여주는 탈북청년
탈북민이 남한에서 3년을 보낸 후 북한으로 돌아오는 험난한 여정을 이야기합니다.
어머니와의 감격적인 재회, 탈북의 어려움, 그리고 남북한의 극명한 대조를 이야기합니다.
그의 이야기는 탈북민들의 고군분투와 통일에 대한 그들의 희망을 조명합니다.
A North Korean defector shares his harrowing journey back to North Korea after three years in South Korea.
He recounts the emotional reunion with his mother, the challenges of escaping, and the stark contrasts between life in North and South Korea.
His story highlights the struggles of defectors and their hopes for reunification.
탈북과 가족의 어려움:
2011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22세의 한 북한 남성이 군 복무나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해 기회가 부족해 탈북했습니다.
탈북자와 그의 친구는 중국으로 탈출하여 3개월 동안 성경을 공부하고, 교회 등록을 통해 한국 입국 서류를 받았습니다.
탈북자의 어머니는 암독강을 건너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망설임 끝에 6월 26일 탈북했습니다.
탈북의 어려움과 위험:
️
탈북은 2019년 5월 압록강을 건너는 것이었으며, 탈북자는 국경 통과를 도울 중국인 6명을 모집했습니다.
탈북자는 젊은 북한 군인을 물리치고 양강도의 한 시골 교회에 2주 동안 숨어서 간신히 체포를 피했습니다.
북한에서 일본 영화나 미국 영화를 보는 것은 가혹한 처벌로 여겨졌으며, 한 친구는 조사 중 절벽에서 뛰어내려 하반신 마비가 되기도 했습니다.
북한 생활:
북한의 식량난으로 개고기, 토끼고기, 고구마를 먹었고, 고춧가루가 비싼 흰 김치와 어려운 가정은 잡곡밥을 먹었습니다.
생활 환경은 열악하여 겨울에는 3cm 두께의 얼음이 얼고 밤에는 끓인 물을 용기에 담아야 했습니다.
교육은 전직 자본가이자 지주 출신 교사들에게 김일성 혁명사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남한 적응:
탈북민은 약 1년간 민주화시민연합에서 교육을 받은 후 국민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탈북자와 그의 아버지는 브로커에게 진 1,500만 원의 빚을 갚기 위해 노력했고, 약 1년 만에 빚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북한 정권의 영향:
탈북자는 북한의 선전과 세뇌 활동이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효과적으로 통제한다고 생각합니다.
국제 사회는 인권 유린을 규탄하고 북한 주민들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지원해야 합니다.
한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적응하려면 문화적 이해와 언어 능력이 필수적이며, 탈북자는 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더 자세한 정리:
탈북 과정:
김강우씨는 2016년에 탈북하여 대한민국으로 이사왔으며, 어머니와 아버지가 북한에 남아 있었고, 3년 정도 한국에서 살다가 2019년 5월에 브로커를 통해 어머니를 모시러 북한으로 다시 가버렸다고 합니다.
김강우씨는 인천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갔으며, 옷이 젖은 상태에서 몸을 하다 보니까 흙먼지가 엄청 붙은 거예요, 그리고 시내에 내렸을 때는 오후 8시쯤이었는데 차들이 다니고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합니다.
김강우씨는 임진강 앞에서 북한이 보이는 곳으로 왔으며, 북한에 한 번 더 갔다 오신 걸로 알고 있고, 다시는 가고 싶지 않지만 통일되면 가야죠라고 합니다.
김강우씨는 22살 때 탈북해서 친구랑 함께 왔었으며, 탈북을 하게 된 원인은 아버지가 먼저 탈북 가셨다가 중국에서 붙잡혀 북한 보위부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김강우씨는 아버지가 정치범으로 몰려서 돌아가시면서 그 사건이 제일 큰 계기였으며, 군대에 나가지 못했고, 돈이 없어서 대학교에 갈 수도 없었고, 북한에서 살면 더 이상 희망도 없었던 거죠라고 합니다.
김강우씨는 어머니가 재원을 하셨고, 새로운 아버지가 러시아에 살고 계시며, 그분이 남한의 대학생 친구들을 만나봤었나 봐요, 그래서 어머니가 매일 희망이 없는 사회에서 썩고 있냐고 말씀을 하시니까 그것도 어느 정도 많은 영향을 줬다고 합니다.
김강우씨는 혼자 나오신 것이 아니며, 친구 한 명이랑 같이 내 넘어왔으며, 그 친구는 지금 결혼하고 잘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탈북을 하기 위해 20살 때부터 결심을 했었으며, 친척이 없는 상태에서 루트를 찾는게 제일 어려웠다고 합니다.
김강우씨는 친구를 데리고 강을 넘겨서 중국에는 가본 경험이 있으니까 그렇게 넘겨 주면 그 친구의 친척분이 우리를 다 데려가 주게 그렇게 얘기를 해 가지고 그런 친구를 두 명을 찾았으며, 세 명이서 너적 강을 건너려고 했지만 결국 그 친구는 혼자 왔고요, 저랑 처음에 같이 가기로 결심했던 친구 둘이서 핸드폰이 문제가 되어서 결국에는 두 명이서 같이 가지 못하게 되었어요.
탈북 청년은 북한 사람들과 함께 중국의 산에서 벌목 일을 하던 중, 중국 사람의 핸드폰을 훔쳐 가지고 나와서 산에서 중국 군인들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중국 군인들이 쫓아오자 친구와 함께 도망쳤고, 친구가 핸드폰을 들고 있었으며, 그 청년은 혼자였기 때문에 친구가 먼저 가거나 자신을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청년은 친구와 함께 한국으로 가기 위해 국경 옆의 도로에 나가서 차를 타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친구가 자신을 찾아와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두 사람은 중국 군인들의 경비대를 피해서 강을 건너고, 숲으로 들어가서 군인들이 쫓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청년과 친구는 브로커를 만나서 한국으로 가는 방법을 물었고, 브로커는 300만 원의 비용을 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브로커는 또한 3개월 동안 중국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 공부를 하면, 교회에서 등록금을 내면 한국으로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청년과 친구는 교회선으로 가서 하나님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때는 교회선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교회선이 안전하다고 한 이유는 브로커가 돈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청년은 10월 6일 한국에 입국하였으며, 탈북자가 많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우물 안에 개구리처럼 살아오다 보니 세상이 넓은 줄을 몰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민수용소에서 태국 남민수용소에 세터민이 150명 정도 있었으며, 국정원과 한원을 수료하였고, 국정원에서 밥이 맛있었다는 얘기를 하셨고, 친구와 오다 보니까 북한에 계신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국정원을 지나서 한원에 수료를 하면서, 사회에 적응하는 기초 교육을 시키는 곳에서 열심히 배웠으며, 북한말과 남한말의 차이, 책을 읽을 때 북한 책과 다른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강호는 북한에 다시 갔을 때 어머니가 불고기를 준비해 주었지만, 삼겹살과는 달리 맛이 안 나더라고 하며, 이는 조미료나 불판의 차이 때문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북한에 다시 갔을 때 김강호는 북한의 음식들이 예상했던 맛과 달랐으며, 삼겹살을 먹고 싶었지만 조미료가 없었고 불판이 달라서 맛이 안 난다고 한다.
김강호는 북한에서 다양한 음식들을 먹어보았으며, 중국돈을 챙겨간 덕분에 어머니가 돈을 받아서 잘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김강호는 북한에 계신 가족분들이 돈을 보내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으며, 한국에서 돈을 보내주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잘 사는 집은 티가 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강호는 돈을 쓰는 것도 점진적으로 나아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괜찮다고 생각하며, 갑자기 많은 돈을 쓰면 뇌물을 쓰거나 발각될 수 있다고 한다.
북한에서 자유나 인권과 같은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하면 다시 북한에서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자유와 인권을 경험한 후에는 북한의 문화와 생활 방식에 적응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북한의 뇌물 문화와 빈부격차가 심하다는 것을 언급한다.
한국에서 다양한 알바를 해보았으며, CU 편의점과 고깃집에서 일한 경험을 가지고 있고, 365 아름다운 가게에서 자원 봉사를 하면서 안 쓰는 물건을 기부하고 재활용하는 것을 도와주는 활동을 했다고 한다.
북한에는 기부라는 개념이 있긴 하지만, 사회적으로 기부를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으며, 기부라고 하긴 어렵지만, 예를 들어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데려다 키워주는 사람이나, 선전용으로 발전소 건설에 기부한다는 식으로 표현한다고 한다.
어릴적에 교육을 받을 때, 지주 출신이지만 애국심으로 땅을 많이 가지고 있는 북한의 자본가나 지주들을 타도 대상으로 보았으며, 김일성의 인품에 매혹되어 땅을 나눠 주는 농부들이 있었다고 한다.
북한의 된장찌개와 김치찌개는 기억나지 않으며, 한국의 식당에서 파는 된장찌개와 김치찌개를 더 좋아한다고 하며, 어머니의 음식은 좋지 않으며, 음식을 하기 위해서는 자유와 여유가 필요하다고 한다.
북한에서도 고기를 구워 먹을 수는 있지만, 한국처럼 구멍이 나거나 불판이 아닌 철판 같은 곳에서 구워 먹었으며, 고기가 많이 타지 않고 삶은 느낌으로 먹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개를 많이 잡아먹으며, 토끼와 닭 등도 많이 먹으며, 단고기는 개고기라고 한다.
북한의 김치는 대부분이 빨간색이지만, 고춧가루가 비싸서 일부 지역에서는 하얀 김치를 먹었다고 한다.
북한의 밥은 양이 많고, 잘 사는 집에서는 다양한 음식을 먹지만, 어려웠던 집에서는 잡곡밥을 많이 먹었다고 한다.
북한에 계실 때 한국에서 제일 먹고 싶은 음식은 카레밥이었으며, 북한에서도 매운 음식을 좋아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고추를 청양 고추로 만들어 먹었으며, 아버지가 매운 음식을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한국 음식 중에서 아직도 못 먹는 음식은 없지만, 평상시에 돈 주고 사 먹지 않는 음식은 곱창이라고 한다.
북한에서는 선풍기만으로 생활하며, 여름에는 집안이 선선하고 겨울에는 매우 추웠다고 한다.
겨울에는 추운 것을 이기기 위해 움직이고, 잘 때는 물을 끓여 놓은 용기를 사용하여 추위를 이기려고 했다고 한다.
북한에서 겨울이 되면 매우 추워서 얼음이 3cm 정도로 얼어 붙는다고 하며, 아몬센이라는 탐험가의 책을 읽은 후 창문을 열고 자서 어머니에게 혼난 적이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추운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하며, 북한에서는 샐러드나 핑크색 무 같은 음식이 없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당근을 기르지 않았으며, 당근을 먹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라면을 먹지 않았지만, 중국에서 라면을 먹어본 적이 있다고 하며, 특히 중국 라면인 우용면을 먹어본 적이 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한국 라면을 먹어본 적이 없으며, 중국 라면을 먹은 것은 중국에서 넘어온 라면을 먹은 것이었다고 한다.
북한과 한국의 문화 차이:
북한에서는 다른 나라의 미디어를 접할 기회가 많으며, 특히 중국과 러시아의 미디어가 많이 유통되며, 한국의 미디어는 가장 드물게 보인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한국 미디어를 보는 것이 가장 처벌이 강하다고 하며, 미국 미디어도 약간의 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일본 미디어도 북한에서 구하기 힘들었으며, 일본 애니를 보는 사람도 거의 없다고 한다.
건물에서 뛰어내린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16살 또는 17살 때 하반신 마비를 가지고 있었고, 조사하다가 오청에서 뛰어내렸다고 한다.
그 친구는 친한 동생의 친구였으며, 뛰어내리는 용기에 놀랐고, 하반신 마비를 가지고 앉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쓰럽다고 한다.
북한에서 노동 교화형이라고 하면 최소 1년을 못 보겠으며, 사람이 웬만하면 죽거나 병신이 돼서 끝난다고 보아야 한다.
북한의 법은 청소년 미성년자라고 해서 봐주거나 그런 건 없으며, 북한에 있는 친구들이 보고 싶지 않지만, 몇몇 친구들은 많이 보고 싶다.
저녁에 혼자 있고 이러면 계속 생각나며, 아무래도 초중고를 북한에서 다녔기 때문에 교육을 받았으며, 친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었다.
친구들이 대학을 다니고 있었으며, 본인들이 대학 졸업하고 일을 하게 되고, 힘들 때 서로 의지해서 같이 살자고 했으며, 가지 말라고 잡아주는 사람들이 고맙다.
연락은 안 되지만, 평생 그 친구들을 기억하고 살겠으며, 여기 와서 좋은 사람들 만나 가지고 같이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 생활:
대학에서는 한국에서 다니고 계시며, 학교가 다른 데로 좀 어이 남안에서 고등교육까지 마친 친구들에 비해서 기초 실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거로 생각하며, 교과의 차이와 교수님들 나름대로의 교재 선정 등이 신기해 보이고 과목의 개수도 다양해서 좋다.
탈북 청년은 북한 대학을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좋았던 북한 대학에 대해 말할 수 없으며, 한국학교도 다니지 않았지만 대한학교의 여명학교에 3개월 정도 다녔습니다.
대한학교에 다닐 때, 3국출생 아이들이 많았으며, 재미있었고, 외국인 처음 보는 경험도 했습니다. 또한, 북한에서 온 아이들이 많았으며, 일부는 중국에서 출생한 아이들이었습니다.
탈북민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 않는다고 하며, 본인은 처음 22살 때 북한을 나왔을 때부터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 않았으며, 대학교에서도 탈북민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말했습니다.
본인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 않으며, 누가 물어보면 얘기를 하지만, 굳이 먼저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사람들이 진심이 전해지면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은 대학에서 동기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으며, 친구들이 자신을 도와주려고 하며,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또한, 본인은 미디어에서 본 것과 달리 대학 학생들이 반듯하고 좋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은 한국에서 약간의 에피소드가 있었으며, 하나는 인천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 한 경험입니다. 본인과 친구, 그리고 형이 함께 인천에 놀러 갔을 때, 아이스크림을 샀으며, 세 명이 하나씩 나눠 먹었습니다.
본인은 대학에서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으며, 약속을 잘 지키고, 세심하게 배려해 주는 친구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본인은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미디어에서 본 것과 달리 대학 학생들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생활의 어려움:
각이 바닥에 앉아 음식을 먹어야 했는데 수푼이 없어서 먹는 방법을 몰랐고, 친구가 먼저 그랬는데 수푼이 없는 것을 보고 불친절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친구가 음식을 땅에 놓고 밟았는데, 그 안에서 수분이 나왔고, 이 경험은 당시의 삶을 살던 사람들이 지금은 잘 적응해서 그런 경험이 꽤 있었음을 보여준다.
종암동에 살았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집을 찾지 못하고 3~4시간을 헤매었던 경험이 있었고, 107동을 찾고자 했지만 여러 개의 107동이 있어서 당황했다.
지하철로 이동하는 것은 쉽지만, 집을 찾는 것은 핸드폰으로 네이버 길찾기를 해야 되는데 처음에는 어려웠고, 카톡 아이디를 만드는 것도 어려웠다.
북한에서 생활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토요일마다 하는 조직 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았던 친구가 있었고, 버스 노선이 많아 버스를 타는 것이 어려웠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갔었지만, 지금은 커피를 좋아한다.
북한에서 김일성 대원수님과 김정일 장원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생활을 돌아보고, 잘못한 것을 반성하고, 앞으로의 대책을 이야기하는 세포총을 하였다.
북한에서 온 젊은이가 한국에서 3년을 살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특히 언어와 문화의 차이로 인해 힘든 적이 많았다고 한다.
한국에서 살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언어 때문이 아니라, 북한과 다른 생활 방식과 문화의 차이였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동네 사람들이 서로 잘 알고 지내고 도와주었지만, 한국에서는 이웃들이 누군지 모르는 경우가 많고, 도와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북한에서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선뜻 도와주었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경우가 적다.